
피지컬 AI 시대, CPU와 기판이 더 무서운 이유
지금까지 AI 산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반도체는 GPU였습니다.
엔비디아의 GPU가 얼마나 부족한지, HBM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빠르게 짓는지가 AI 산업의 핵심 지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AI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AI가 데이터센터 안에만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에 AI가 들어갑니다.
로봇에도 들어갑니다.
드론과 CCTV, 스마트폰과 PC, 공장 설비와 각종 가전제품에도 AI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단순히 AI가 들어가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AI 에이전트가 이 기기들을 서로 연결하고, 명령하고, 작업을 수행하는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른바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AI가 세상에 퍼질수록 정말 GPU만 많이 필요할까요?
AI가 많아지면 '조정하는 컴퓨터'가 필요해진다
생성형 AI 시대에는 GPU가 주인공이었습니다.
대규모 AI 모델을 학습하고 추론하는 데 엄청난 병렬연산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의 역할이 커지면 컴퓨팅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에이전트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고,
여러 프로그램을 호출하고,
다른 AI에게 작업을 맡기고,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다음 작업을 지시해야 합니다.
즉 AI가 많아질수록 AI를 움직이고 조정하는 컴퓨팅 수요도 커집니다.
이를 흔히 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생각하면 GPU가 AI의 강력한 연산 장치라면,
CPU는 수많은 AI와 프로그램 사이에서 누가 무엇을 할지 조정하는 교통경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기존 데이터센터의 GPU와 CPU 구성 비율이 약 8대 1 수준에서 앞으로 1대 1에 가까워질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비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AI 인프라가 GPU 하나에 집중된 구조에서 CPU·메모리·네트워크·스토리지까지 함께 확장되는 구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재미있는 곳은 따로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내려가 보겠습니다.
CPU가 많이 필요해지면 CPU만 많이 만들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도체는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성능 칩을 만들려면 메모리가 필요하고,
전력이 필요하고,
패키징이 필요하고,
기판이 필요합니다.
특히 고성능 CPU와 GPU를 연결하는 ABF 기판은 AI 인프라가 확장될수록 중요성이 커질 수 있는 부품 중 하나입니다.
ABF는 반도체 패키지와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고성능 패키지 기판에 사용되는 소재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뉴스에서 GPU처럼 주목받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CPU와 GPU를 만들어도 이를 안정적으로 패키징하고 연결할 기판이 부족하다면 최종 제품 생산에는 병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AI 산업을 볼 때 중요한 변화입니다.
병목이 항상 가장 비싼 칩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관심을 덜 가지는 부품에서 공급 부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GPU가 부족하다는 말에 익숙해졌지만
AI 반도체 쇼티지라고 하면 대부분 GPU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최근 공급망을 보면 다른 모습도 나타납니다.
제공된 자료에서는 반도체 공급망의 리드타임이 긴 주요 품목 가운데 특히 ABF 기판, DRAM, HDD가 심각한 품목으로 언급됩니다.
반면 GPU 재고 상황은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AI 인프라가 성장한다고 해서 모든 부품의 공급 부족이 똑같이 심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품은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품은 공장을 새로 짓고, 장비를 설치하고, 수율을 안정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결국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가장 비싼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 만큼 빨리 만들 수 없는가?”
가 될 수 있습니다.
AI 산업의 다음 병목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AI가 현실 세계로 내려오면 Q가 중요해진다
여기서 반도체 사이클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등장합니다.
바로 P와 Q입니다.
P는 가격입니다.
Q는 물량입니다.
과거 메모리 산업은 대표적인 가격 사이클 산업이었습니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올라가고,
가격이 올라가면 기업들이 생산량을 늘리고,
공급이 다시 많아지면 가격이 내려갑니다.
전형적인 반도체 사이클입니다.
그런데 AI가 반도체 수요의 구조 자체를 바꾸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HBM이 범용 메모리까지 흔드는 이유
AI 서버에는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HBM이 일반적인 메모리보다 훨씬 많은 생산능력과 웨이퍼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HBM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 메모리 업체의 생산능력이 HBM 쪽으로 배분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범용 DRAM인 DDR5 등의 공급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AI 하나가 잘 팔리는 것이 단순히 AI용 메모리만 잘 팔리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정된 생산능력을 어디에 배분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AI가 본격적으로 산업 곳곳으로 확산되면 반도체 시장은 단순히 가격이 오르는 사이클을 넘어,
얼마나 많은 칩을 실제로 생산해야 하는가
라는 물량의 문제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P 사이클에서 Q 사이클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입니다.
피지컬 AI는 반도체 수요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
생성형 AI는 주로 데이터센터에서 엄청난 컴퓨팅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피지컬 AI는 다릅니다.
AI가 자동차에 들어가면 자동차 한 대마다 컴퓨팅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로봇에 들어가면 로봇 한 대마다 필요합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면 스마트폰마다 필요합니다.
공장 자동화 시스템에도 필요합니다.
카메라와 센서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AI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센터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물리적 기기로 분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AI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AI는 GPU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CPU가 필요합니다.
메모리가 필요합니다.
스토리지가 필요합니다.
통신칩이 필요합니다.
전력관리 반도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기판과 패키징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피지컬 AI 시대의 반도체 산업을 바라볼 때는
“어떤 AI 모델이 가장 뛰어난가?”
만큼이나
“그 AI가 현실 세계에 몇 개나 배치될 것인가?”
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다음 반도체 사이클은 조금 다를 수 있다
AI 산업 초기에는 질문이 단순했습니다.
GPU가 충분한가?
그다음에는 질문이 바뀝니다.
HBM이 충분한가?
그리고 앞으로는 질문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CPU가 충분한가?
DRAM이 충분한가?
ABF 기판이 충분한가?
패키징 생산능력이 충분한가?
전력과 네트워크가 충분한가?
AI가 현실 세계로 내려올수록 하나의 반도체만 잘 만든다고 끝나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I 투자에서 정말 봐야 할 것은 '병목'일지도 모른다
AI 산업의 승자를 찾는 방법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기업만 바라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커질수록 오히려 병목을 가진 기업이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GPU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HBM이 부족하면 생산이 막힙니다.
HBM이 충분해도 패키징 능력이 부족하면 막힙니다.
칩이 충분해도 기판이 부족하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품이 충분해도 전력이 부족하면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수 없습니다.
결국 AI 산업은 거대한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수많은 병목이 연결된 공급망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AI 투자는
“AI를 만드는 기업이 누구인가?”
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AI가 세상에 퍼질 때 가장 먼저 부족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GPU 다음을 봐야 하는 이유
지금까지 AI의 상징은 GPU였습니다.
하지만 AI가 데이터센터를 넘어 자동차와 로봇, 공장과 스마트폰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AI는 더 이상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억 개, 어쩌면 수십억 개의 기기 속에서 작동하는 작은 컴퓨터들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GPU 하나가 아닙니다.
CPU와 메모리,
패키징과 기판,
통신과 전력,
그리고 수많은 부품입니다.
AI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I가 진짜 세상으로 내려오는 순간부터 새로운 반도체 수요가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시장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누가 가장 좋은 AI 칩을 만드는가?”
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수 있습니다.
“AI가 10억 개의 기기에 들어간다면, 그때 가장 먼저 부족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다음 반도체 사이클은
P가 아니라 Q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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